[NocutView] "그땐 내가 날렸어"... 어느 퇴역 여군의 회상

2019-11-04 0

올해로 여군 창설이 64주년을 맞았다. 4백 여명에 불과하던 여군 수가 64년 동안 9천여명에 육박하고 장군도 8명이 배출되는 등 여군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해왔다. 하지만 지금의 여군이 있기까지 밑거름 역할을 했던 퇴역 여군들 가운데 상당수는 여군출신에 대한 선입견과 강제 전역, 결혼실패 등의 이유로 생활고를 겪고 있다. 꽃다운 청춘을 국가에 바친 퇴역 여군에 대한 국가지원은 전무한 실정이다. CBS 노컷뉴스는 모두 5차례에 걸쳐 퇴역 여군의 실태를 살펴보는 연속기획을 마련했다.[편집자주]

◈ 6.25 전쟁통에 세 오빠 잃고 여군에 자원입대

"내 방에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고 너무 외로워서 군생활 시절에 찍은 사진도 다 찢어버리고 죽을라고 약을 먹었어.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더 살아라'고 하셨는지 지금 이렇게 살아있지."

경기도 부천의 한 임대아파트에 홀로 살고 있는 김백희(77) 할머니. 하얗게 센 머리를 짧게 자른 김 할머니가 군 시절에 썼던 베레모를 쓰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8남매 중 다섯째인 김 할머니는 6.25 전쟁이 한창이던 13살 때 경찰이었던 큰 오빠가 북한군에 의해 무참히 총살 당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 이후 역시 경찰이었던 둘째 오빠도, 학도병으로 지원한 셋째 오빠도 모두 전쟁통에 목숨을 잃었다.

김 할머니는 "오빠 세 명이 모두 6.25때 북한군한테 죽었어. 그래서 어린 마음에 북한군을 무찔러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17살 때 여군에 자원입대했지"라고 여성의 몸으로 군에 입대한 이유를 조근조근 설명했다. 이 때가 전쟁 직후인 1954년이다.

김 할머니는 여군훈련소 8기생으로 초창기 여군의 일원이었다. "논산에서 훈련을 받을 때 김현숙 대령(초대 여군병과장)이 와서 '여군은 총이 없으면 부지깽이라도 들고 나가서 싸워라'하면서 가르쳤는데 그 말이 지금도 기억이나. 참 그 때는 훈련이 힘든 줄도 모르고 열심히도 받았어"라고 김 할머니는 당시를 회상했다.

여군훈련소 인사계 등에 근무하며 여군 최초로 육군수송학교를 졸업한 김 할머니는 당시 남자들도 몰기 힘들었던 군용 지프차를 몰았다. 보병학교에서 태권도 2단 자격증도 땄다.

"지금은 이렇게 꼬부랑 할머니가 됐지만 그래도 그때는 내가 날렸어"라며 손가락을 추켜세우는 김 할머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 군 생활로 결혼도 포기...생활고에 병까지

하지만 "그렇게 좋아하던 군을 왜 떠났냐"는 질문에 금새 김 할머니의 고개가 떨어졌다. 중사로 근무하던 1962년 연말, 김 할머니는 직속 상관에게 지나가는 말로 "나도 좋은 세단차 한번 타보고 싶다"고 말했고 그 상관은 "그럼 제대해서 돈 벌어라"며 전역 절차를 밟았다.

며칠 뒤 이 사실을 안 다른 상관이 "전역 절차를 중단해 달라"고 국방부에 탄원까지 냈지만 이미 국방부가 전역처분을 내린 상황이었고 김 할머니는 눈물을 머금고 꽃다운 청춘을 바친 군을 떠나야 했다.

당시 김 할머니의 나이는 이미 20대 중반을 훌쩍 넘었고 당시만 해도 결혼 적령기를 놓친 노처녀 중의 노처녀였다. 거기다 여군 출신에 대한 선입견으로 결혼은 일찌감치 포기했다.

이후 김 할머니는 군 시절 전공을 살려 20여년 간 택시를 몰며 생계를 이어갔지만 여성차별이 심했던 당시 여성이 홀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삶을 꾸려가기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군시절 몸에 밴 성실함으로 차곡차곡 돈을 모아 이제 살만하다 싶어지니 병이 찾아왔다. 김 할머니는 그 뒤 몇 차례의 대수술로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고 모아놓았던 돈도 다 병원비로 써버렸다.

이후 모 종교시설이 운영하는 복지관에서 버스를 몰며 몸을 의탁했던 김 할머니는 지금은 12평짜리 임대아파트에서 기초생활수급비 30만원으로 힘겹게 생을 이어가고 있다. 물론 퇴역 여군이라고 받는 혜택은 전혀 없다.

CBS노컷뉴스 임진수 박기묵 기자